[권동철의 한국현대미술脈-理氣와 추사 김정희:작가篇] 서양화가 이태현②‥직선의 휘어짐 생멸변화의 탄성(彈性)[갤러리 비선재,周易 주역 I Ching,이태현 미술가,Lee Tae Hyun,이태현 작가,이태현 화백,통인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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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130×130㎝ Oil on Canvas, 1970. 국립현대미술관소장. 사진제공=이태현.
“공자가 말씀하시길 역이란 비추는 것이고 변하여 바뀌는 것이고, 바뀌지 않는 것이다. 孔子曰 易者 易也 變易也 不易也.1)”
이태현(Lee Tae Hyun,1940~)화백은 1970년 우주삼라만상을 평면화시킬 수 있다는, “지금은 기억이 명화하지 않지만 당시 주역(周易) 관련 책에서 읽었던 한 구절2)”에 매혹되어 첫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오늘날까지 일생화업의 테마가 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서울소재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작가는, “당시 환경정리를 미술과에서 담당했고 테이프사용을 많이 했었다. 나에게는 자연스럽고 익숙한 재료였다. 나의 작업에 테이프를 채택하게 된 배경3)”이라고 말했다.
◇질서와 운동을 일으키는 정반합의 시각화
마스킹 테이프(Masking Tape)작업은 바탕에 색채를 겹겹 올린 후 테이프를 붙이고 다시 그위에 페인팅을 하고 마른 다음 떼어 낸다. 그러나 작업초기엔 화면전체에 테이프를 붙여놓고 그 위에 페인팅을 하고 마른다음에 하나씩 분리시켜 색채를 드러내는 방법이었는데, 대작(大作)일수록 체력적 부담이 큰 단점이 있다.
바탕색이 축적된 층위(層位)는 심연의 깊이감으로 배어나온다. 생성과 소멸의 순환이 그곳에 스며있고, 다시 수직수평의 테이프 흔적이 중첩되어 형식(形式)이 보다 뚜렷해 진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태현 회화가 주역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테이프는 주역 64괘(卦) 음과 양의 효(爻)가 어우러져 전체가 조성되는 매개체 역할이다. 그 위에 다채로운 색채가 얹힘으로써 이전의 틀은 모순(矛盾)과 전환(轉換)의 계기를 맞는다. 그럼으로써 화면은 자연계 기운의 구조가 시각화되는 터전으로써 그윽한 농담(濃淡)이 우러나오는 주역철학과 연결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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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130×130㎝ Oil on Canvas, 2023. 통인화랑(TONG-IN Gallery) 개인전 2024. 사진=권동철. |
◇몸 동작의 반복 그 수행성의 현재화
이태현 작가는 고령(高齡)임에도 불구하고 100호 이상 캔버스 상하좌우(上下左右)에 테이프를 붙여나가는 반복전개를 필자는 여러차례 보았다. 그러한 신체성은 바로 편중(偏重)됨 없는 상태로 들어가는 관문(關門)과 통한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저 길에 괸 장마물 퍼서 큰 그릇에 앉혔다가, 다시 떠서 작은 그릇에 붓네.(泂酌彼行潦 挹彼注玆)’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주역’의 도를 아는 것입니다. 다시 떠서 작은 그릇에 옮겨 부은 다음에는 어느 물건인들 평균해지지 않겠습니까. 평균이라는 것은 물(物)마다 각각 제자리를 얻는 것이니, 제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 평균해지지 못한 까닭입니다.4)”
이러한 행위는 작가의식의 현재화(顯在化)로 수행성과 직결된다. 바탕을 여러 겹 올리거나, 테이프에서 드러나는 직선과 그리드(Grid) 생성 등은 동작의 반복이 응축된 산물이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신체성(Corporeality)과 흔적,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진 밸런스가 화면인 것과 다름 아니다.
“내가 내 몸을 통해 ‘사물들’을 지각하는 것처럼, 나는 내 몸을 통해 타인을 이해한다. 이와같이 ‘이해된’ 몸 동작의 의미는 몸동작 배후에 있지 않다. 몸 동작의 의미는 몸 동작이 그려내는 세계의 구조, 또 내가 내 것으로 다시 잡는 세계의 그 구조와 하나가 된다. 그것은 몸 동작 자체에서 전개5)”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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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Space, 135×135㎝ Oil on Canvas, 2020. (오른쪽)Space, 130×130㎝ Oil on Canvas, 2023. 갤러리 비선재(BISUNJAE Gallery)기획 엠아트센터(m·ART center) 2025. 사진=권동철. |
◇직선의 휘어짐 생명성에 관한 현상학
전술한 바와 같이, 이태현 ‘주역’작품 직선은 직자로 만든 것이 아니라 테이프로 조성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직선은 어떤 기준이 아니라 주역이 품고 있는 우주자연계와 작가의 몸이 맞닿아 발생한 것이다. “작업을 하다보면 실제로 직선은 가면서 휘어진다. 자(尺)가 없이도 테이프로 직선을 만들고 겹치기도 하는 나의 작업행위는 일반적으로 ‘손으로 자(尺)를 대고 긋는다’는 것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가버린 것이다.6)”
때문에 이 휘어짐은 작가의 호흡, 인력(引力), 반복의 미세한 차이 등의 영향으로 화면이 살아 숨 쉬는 탄성(彈性)의 근거가 된다. “형이상학자가 선을 긋지 않는다면, 그는 사유하겠는가? 열려 있음과 닫혀 있음은 그에게는 바로 사상들인 것이다. 열려 있음과 닫혀 있음은, 그가 모든 것에, 그 의학적 체계에까지도 결부 시키는 메타포7)”들이다.
따라서 이태현 작업의 직선은 공간을 나누고 체계를 구축해 나가는 생명성에 관한 현상학(Phenomenology)의 출발점이 된다. “넓고 아득하여 끝이 없는 ‘태허(太虛)의 기’는 오르고 내리며 날아 퍼지는 것을 잠시도 그쳐본 적이 없고, 잠시도 어느 한 단계에 머물러본 적이 없다. 이것은 이른바 ‘주역’에서 말하는 인온이요, ‘장자’에서 말하는 ‘생물이 숨기운을 서로 불어대는 것’, 즉 아지랑이다. 이러한 기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꽉 차 있고 움직이면서도 고요한 것의 기틀이며, 음과 양, 굳셈과 부드러움의 시초다.8)”
한편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은 직선의 폭(幅), 반복되는 ‘띠’이다. 이것은 규칙과 질서라는 순환의 진리를 은유하고 화면 짜임새의 중심 축(軸)이 되며 동시에 전체를 균형잡는 기제(機制)가 되는 조형적 형상이다. “초기의 검은 띠는 완벽한 형상이기 때문에 자꾸 변형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엔 젊어서 다른 시도를 많이 했었던 것 같다. 시행착오 끝에 결국 다시 직선 형태로 돌아왔다.9)”
작가가 말한 ‘완벽한 형상’이란, 주역이 품은 우주질서와 생성변화가 내재된 ‘띠’의 다른 표현이다. 그것이 가장 근본이 된다는 작가의 인식과 맞물리는데, 이 지점은 퇴계 이황(李滉)이 만년에 제시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주자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도설(圖說)의 머리 부분에서는 음양에 의한 변화의 근원을 말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곧 인간의 타고난 것(所稟受)을 밝혔다. 여기 ‘오직 인간만이 그 빼어난 것을 얻어서 가장 영특하다’한 것은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성(性)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태극이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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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이태현 미술가. 사진=권동철 2026. © 2026. Lee Tae Hyun. All rights reserved. |
◇한국 성리학의 확장 독창적 현대추상
“처음에는 괘(卦)를 페인팅 하는 방법론을 흑(黑)과 백(白) 대립으로 보았었다. 그러다 간헐적으로 칼라를 실험하기도 했는데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화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색채의 다양한 변주(變奏)로 작업 폭이 넓어진 것이다.11)”
색채의 확장은 마스킹 테이프, 반복과 수행성, 직선의 휘어짐에 불어넣은 인간과 우주의 생명성, ‘띠’가 갖는 사유의 확장 등과 함께 주역이라는 동양철학을 현대미술의 참신한 조형언어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가치를 부여하게 한다. 아울러 주역을 가장 한국적인 철학체계와 조형적 관계로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성리학 지평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도 깊게 조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태현 ‘주역’시리즈 화면에 깃든, “태양의 빛살 속에 요동치는게 관찰되는 이 알갱이들에 주목하는 것은 이런 이유로 하여 더욱 더 타당하다. 즉, 그 같은 요동은 그 밑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질료의 운동이 또한 존재함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당신은, 많은 입자들이 보이지 않는 타격에 흔들려 궤도를 바꾸고, 뒤로 튕겨나 때로는 이쪽, 때로는 저쪽, 사방 온 부분으로 돌아서는 것을 볼 터이니 말이다. 물론 이 떠돌이 운동은 시초적인 것으로부터 와서 모든 것들에게 있게 된 것이다.12)”
[참고문헌]
1)오십에 읽은 주역, 역위·건착도(易緯·乾鑿度), 강기진 지음, 유노북스.
2),3),6,9,11)이태현 작가, 나의 평면회화 ‘주역’ 작업, 2026.
4)완당전집 제3권 서독(書牘),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 한국고전번역원 임정기 譯, 1995.
5)지각의 현상학,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지음, 주성호 옮김, 세창출판사.
7)공간의 시학(La poétique de l'espace), 가스통바슐라르(Gaston Bachelard), 곽광수 옮김, 동문선.
8)정몽(正蒙), 장재(張載) 지음, 책세상.
10)퇴계선집, 이황 지음, 윤사순 역주, 현암사.
12)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지음, 강대진 옮김, 아카넷.
[글=권동철 미술전문기자·전문위원. 7월20일 2026. 인사이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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