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전시장 IN]화가 윤종득‥선의 준법 산의 축약[YOON JONG DEUK,백악미술관,윤종득 작가,윤종득 화백]

이미지
작품 앞에서 산하 윤종득 . 신몽유도원도 ( 新夢遊桃源圖 ), 가로 8m60 ㎝ , 세로 155 ㎝ 황토에 먹 , 2024. 사진 = 권동철 . 작품 앞에서면 산길에 첫 발을 들여놓은 느낌이다 . 장엄한 바위와 능선의 기운생동 ( 氣韻生動 ) 에 압도당하고 동시에 가늠할 수 없는 어떤 희열이 샘물처럼 솟아오른다 .   윤종득 화백이 수십 여 년 동안 축적한 기운을 온전히 쏟아 부은 , 혼신의 필법으로 그려낸 역작 ‘ 신몽유도원도 ( 新夢遊桃源圖 )’ 가 태고의 골격 그대로 초연히 서 있다 . 가로 8m60 ㎝ , 세로 122 ㎝ 초대작이다 .   신몽유도원도 - 왼쪽 디테일 (detail), 사진 = 권동철 . 화면은 모든 잎들이 낙하한 목체 ( 木體 ) 만이 앙상하게 드러난 겨울 산처럼 그러나 들여다보면 복잡다단한 고리의 결합과 확장으로 탄탄한 축약의 아우라를 품고 있다 . 인간군상 , 갑골상형 같은 전서 ( 篆書 ) 의 문자 , 자연의 형상 등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생 ( 生 ) 의 속뜻을 일깨운다 .   그곳엔 추사 김정희 ( 秋史 金正喜 ,1786~1856) 의 대련 ( 對聯 ) 으로 널리 알려진 ‘ 靜坐處茶半香初 ( 정좌처다반향초 ) 妙用時水流花開 ( 묘용시수류화개 )’ 를 윤종득 작가의 독자적 조형언어 ‘ 산하준법도 ( 山下皴法圖 )’ 로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   신몽유도원도 - 중앙 디테일 (detail), 사진 = 권동철 . 윤종득 ‘ 신몽유도원도 ’ 는 돌을 칼로 각 ( 刻 ) 할 때 돌이 깨지면서 의도에 따라 혹은 의도치 않게 생기는 파열을 돌 대신 종이에 , 칼 대신 붓으로 구현했다 . 전체를 가장 단순화시킨 바탕에는 전각 ( 篆刻 ) 의 선 ( 線 ) 이 깔려 있다 .   쇠같이 날카롭고 강하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탄력 이른바 붓 속에 칼이 감추어진 형국이다 . 바로 전각의 선과 회화적인 요소를 접목시킨 , 오직 선의 형태에 의해 결정되는 에너지 가득한 산하준법이다 . 선 변화가 만든 무수히 많은 공간들엔 도침 (

[권동철의 화가탐방]화가 조향숙④‥불교미술과 조상(造像)[뢰차(Roe Cha),불교미술,서급(西汲)조향숙,조향숙 작가,Jo Hyang Sook,논객 석도륜(昔度輪)]

이미지
  조향숙 작 = 뢰차 , 상판 위 판각 , 1998. 사진 = 권동철 . “ 스승 석도륜은 뢰차 (Roe Cha) 회원들에게 풀 섶 돌무더기에 자라나는 풀같이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최고라고 말씀했다 . 명예를 탐하는 곳에는 기웃거리지 말고 너희 자신들이 최고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가르쳤다 . 1) ” 기독교 미술이라고 하기 보다는 성화 ( 聖畫 ) 라고 하듯이 , 불교미술이기 보다는 ‘ 조상 ( 造像 )’ 이라야 옳다 . 독일의 유물적인 명구로서 불화를 ‘ 불교문화재 ’ 로 부르면서 그 누구도 이의를 느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 홑으로 , ‘ 불교문화재 ’ 그것으로 끝내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 그 이상인 것이다 .   서양에서 제 4 세기 경 로마의 효교가인 락텐듀스가 라틴어의 릴리전 ( 宗敎 ) 을 정의하기를 ‘ 종교란 신 ( 神 ) 과 사람 ( 人 ) 과의 인격적 관계이다 ’ 라고 했듯이 , 서양의 종교는 반드시 종교적 객관인 신과 종교적 주관인 인간의 영혼이 있어야 한다고 믿어져 왔다 . 그렇다면 불교도 과연 그러한가 . 불교에 있어서는 어떠한 신도 인간의 개아적 ( 個我的 ) 인 영혼의 불멸설도 세우고 있지 않다 .   조향숙 작 = 뢰차 , 반절 순지 먹 , 2009. 원시불교에 있어서 불타 ( 釋迦 ) 는 신의 존재를 단호히 부정하는 바 있었다 . 불교에 있어서는 종교유의 객관인 신도 종교의 주관인 영혼도 인정치 않는다 . 불교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인도를 정복하고 모헨조다로의 문명유적을 헐어뜨려버린 , 그리고 카스트에 의한 통치를 하였던 아리안족의 신 ( 神 ) 브라흐만 ( 婆羅門 ) 같은 존재를 불타는 ‘ 진정한 삶을 구현하려는 사람에 있어서 신이란 거대한 방해물이 될 뿐 ’ 이라고 했다 .   아마 이같은 말은 근세의 ‘ 타고르 ’ 도 한 바 있다 . 그래서 서양의 종교학자 및 철학자들 사이에는 불교가 끝내 종교가 될 수 없다는 주장들이 쉴새없이 일고 있는 것이다 기껏해야 유현 ( 幽玄 ) 스러운

[전시]서양화가 이은경‥‘내 안의 빛-여정’초대전, 5월23~6월3일, 갤러리 두 [이은경 작가,LEE EUN KYUNG,Gallery DOO]

이미지
내 안의 빛 - 여정 , 73×73 ㎝ Mixed media on canvas, 2024 빛을 찾아가는 여정을 화폭에 펼치는 이은경 작가의 열세 번째 ‘ 내 안의 빛 - 여정 ’ 개인전이 5 월 23 일부터 6 월 3 일까지 서울강남구 청담동 , 갤러리 두 (Gallery DOO) 에서 열린다 .   내 안의 빛 - 여정 , 117×73 ㎝ (each) Mixed media on canvas, 2024 2 년여 동안 은수자 ( 隱修者 ) 처럼 침묵으로 보낸 시간을 화폭에 담은 신작 45 여점을 선보인다 . 한지 , 톱밥 등 여러 재료를 겹겹으로 올리고 반복적으로 칠하여 표현하는 과정은 수행과 닮았다 .   내 안의 빛 - 여정 , 73×60 ㎝ Mixed media on canvas, 2024 이은경 (LEE EUN KYUNG) 작가는 “ 이번 작업에서 종교적 영성을 체험하고 충만한 마음으로 붓을 들었다 . 내 안의 깊은 영혼을 비추는 순수하고 영원한 빛으로 작품을 보는 분들과 공감하고 싶다 .” 라고 전했다 .                       내 안의 빛 - 여정 , 90.9×65.1 ㎝ (each) Mixed media on canvas, 2024 [ 글 = 권동철 , 5 월 14 일 2024, 인사이트코리아 ]

[권동철의 화가탐방]화가 조향숙③‥대중과 함께하는 불화[불교미술,논객 석도륜(昔度輪),서급(西汲)조향숙,조향숙 작가,Jo Hyang Sook]

이미지
  조향숙 作 = 전지 , 장지 석채 , 1985(each). “ 석도륜 선생은 나에게 ‘ 전통불교의 도상을 예술작품으로 해석해서 표현하라 ’ 고 가르쳤다 . 1) ”   근자 , 국어학에 대한 울연 ( 鬱然 ) 하였던 학식축적 ( 學殖蓄積 ) 을 정기 ( 精忌 ) 한 범용한 학인들의 오해로 한문이란 이름의 국학고전이 무자비스레 도륙 ( 屠戮 ) 되어지고 인멸 ( 湮滅 ) 되어지려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한심스러움은 독서 없는 사람들에 의한 한자계 ( 漢字係 ) 언문 ( 言文 ) 의 혼란기술 ( 混乱記述 ) 이다 .   한자비근 ( 漢字批斤 ) 의 미망 ( 迷妄 ) 은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허물이지만 대학 ( 大學 ) 에 있어서 한자 추방을 틈타서 한자장인의 오류 ( 誤謬 ) 는 실로 어찌해볼 도리 없는 노릇이다 .   고전 , 고대학 ( 古代學 ) 속에 비로소 있게 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 이런 말 굳이 붙이는 까닭은 비록 그림 한 장 제대로 독화 ( 讀畫 ) 하며 그리다 말고 사라져가는 생애일지라도 뭔가를 깨닫기 위해 온몸을 다바치기와 똑 같은 이치와도 같은 것이다 . 어린이들에 예능교육의 필요성도 바로 이 같은 것이다 .   조향숙 作 = 반절 , 장지 석채 , 1986. 일점일획 ( 一點一劃 ) 의 ‘ 엔 ’ 곧 있음으로 해서 풍부한 감각 , 풍부한 상상력보다 오히려 엄격한 규율 한가운데서 자유의식을 찾고자 함인 것이다 . 철학이라고 하는 이름의 과학기술 예술이라고 붙여진 이름의 기능자 ( 技能者 ) 그들은 이미 울연 ( 鬱然 ) 한 위세 ( 威勢 ) 를 갖춘 깊고 높은 산 ( 山 ) 의 전용 ( 全容 ) 을 알지 못한다 .   까닭에 역사이건 고전 , 고대학 ( 古代學 ) 이건 그것에 관심 두는 까닭은 지러지러한 사실 곧 ‘ 엔 ’ 을 많이 외우려는 것 분석 , 판석 ( 判釋 ) 에 머무려는 것이 아니라 개적자아 ( 個的自我 ) 의 내적해방과 자유를 얻기 위한 엄숙한 규범을 공부하기위해서인 것이다 .   진리파지 ( 眞理把持 ) 의 ‘ 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