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철의 한국현대미술脈-理氣와 추사 김정희:작가篇] 서양화가 이태현①‥변화와 생성 그 존재론적 수행[이태현 미술가,이태현 화백,이태현 작가,Lee Tae Hyun,경북예천출신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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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 이태현 화백. 사진=권동철. 3.23.2026. © 2026. Lee Tae Hyun. All rights reserved.
“그러나 모든 부분들을 흘러 넘쳐 이성은 전체의 질량을 이끌고가며 물체를 관통한다.1)”
이태현(李泰鉉,Lee Tae Hyun,1940년~)작가는 유교적 질서와 선비정신의 산실인 경북예천에서 성장했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59학번’이다. 6·25 전쟁, 2~3학년 때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굵직한 한국현대사를 관통해 왔다. 그의 예술은 주역사상을 비롯하여 현수선(懸垂線), 마블링(Marbling) 등의 미학적 정신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이태현 회화의 궁극의 기조는 무엇인가에 대한 담론의 시점에 이르렀다.
◇실험미술에서 삼라만상의 평면화
이태현은 1962년 대학 4학년 때 실험미술그룹 ‘무(無)동인’ 창립멤버였지만 1970년 평면회화로 옮겨오게 된다. “그 시절은 실험미술을 하기엔 시대적 어려움이 있었고 논리도 빈약했다. 나는 마냥 그 물결에 휩쓸려 가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런 갈등이 일어나던 시점에 우연히 주역 책에서 8괘(八卦)를 본 것이다. 지금 기억이 명확하진 않지만, ‘모든 삼라만상을 평면화시킬 수 있다.’라는 내용에 신선한 충격을 받아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 한 줄에 고민의 해법이 모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우주삼라만상의 평면화’에 착수했다.2)”
이른바 이태현 주역철학작업은 그렇게 1970년에 시작하여 이듬해 71년 한국미술대상전에 두 점을 출품하여 모두 입선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 작업은 마스킹 테이프기법을 통한 괘의 음양원리를 한 칸 한 칸으로 전체화면을 뒤덮는 표현방식이다. 참신한 모습의 삼차원적 감각의 심도가 표출하는 생성과 소멸의 변주는 주역미학이라는 독창적 세계관의 지양(Aufhebung) 원리를 담아 여백이 실제가 되고 실재가 여백이 되는 변화무상으로 펼쳐진다.
이러한 “(…)생성은 오직 존재의 존립을 뜻하면서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비존재의 존립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결국 이 양자의 존립은 오직 이들이 하나로 합쳐진(상태의) 존재(ihr Sein in Einem)라는 것이 된다. 바로 이와같이 합일된 상태의 존립이야말로 바로 그들 서로의 구별을 지양하는 것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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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현 화백 작업도구. “1959년 홍익대 서양화과 1학년 때 구입한 페인팅나이프 및 붓을 현재까지 쓰고 있다”라고 전했다. 사진=권동철. 2026. |
또 1970년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와서 정착된 작업은 화면에서 검은 공간을 밀치고 내려오는 푸른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현수선이 핵심주제이다. 그것은 “알맞게 무겁고 미끄러운 기와지붕의 곡선, 사뿐히 고개를 든 두 처마끝이 그의 지붕 밑에 배꽃처럼 소박하고 무던한 한국의 마음씨들을 감싸 안고4)”있는 듯 한 안정과 인력(引力)의 균형곡선이다.
“당시 새벽에서 아침으로, 낮에서 저녁으로 흐르는, 삼라만상이 밝았다가 어두워져가는 시간의 순환성을 집약시키는 것으로써 한국 특유의 선에 대한 탐구를 많이 했다. 표현의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5)” 이 현수곡선의 작업은 1978년 한국미술협회전, 국전(國展,80~81)에 연이어 수상하게 된다.
한편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마블링 작업은 물과 기름이 반발하는 원리를 활용한 것이다. “마블링 작업은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우주논리와 같은 것이다. 우연성의 세계가 펼쳐진 후 그 위에 작가가 의도할 수 있는 세계를 창출할 수 있는 기쁨이 있다. 모든 미술작업이 그러하지만 특히 마블링 기법에는 정신이 들어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6)”
“곧 자연의 가장 작은 부분들은 더욱 더 유동성에 의해서 결합7)”된다는 것은, 부연하면 물성의 리듬에 맡기는 우연과 생성(Becoming)이 발현된다는 점에서 이태현 회화의 귀중한 미학적 결실임을 증명한다. “리는 ‘저절로 그러한 리(自然之理)’ 즉 천리(天理)이다. 주자학에서 천(天)은 무엇보다 먼저 ‘저절로 그러하다(自然)’는 뜻이다.(....)객관적으로 입증이 불가능한 이런 믿음의 근저에는 자연 혹은 내면 회귀의지가 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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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er Drawing, 72.7×60.6㎝ Oil on Canvas, 2002. 사진제공=이태현.
◇시대의 층위 기억에 내재된 정신
“나는 5~6세 때 서당을 다녔다. 친구할아버지께서 훈장이셨는데 그때 천자문을 다 뗐다. 한국전쟁 후 대문간에 대략 부인들이 구걸하러 서 있으면 할머니께서 쌀이나 음식을 주는 조선시대 유습(遺習)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 후 성장해 외지로 나와 급격한 사회변화를 많이 보고 겪었지만, 결국 내 예술의 본바탕엔 유교의 겸양지덕 정신과 풍습이 도저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9)”
그 중에서도 안동·예천·의성지역의 심학덕목의 전통을 보존해 온 “서원에는 철저한 자기수양을 통해 본성을 선양하고자 했던 옛 사람들의 고귀한 이상이 깃들어 있다. 올바른 신념, 그리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조선 사람들의 기개와 의지가 서려있고 최고의 인격체에 오르고자 했던 인물들의 치열한 탐구와 실천10)”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점은 특히 이태현 화백이 한국전쟁, 4.19 혁명 등 혼돈의 시대를 체험했던 것을 감안할 때, 주역세계가 펼치는 순환의 질서와 자신의 그리드(Grid)적 규칙의 회화구성에 강렬한 실마리를 찾은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내가 자란 지역은 각궁(角弓)으로 유명하다. 또 동네엔 흑립(黑笠) 갓을 만드는 장인도 계셔서 어릴 때 옻칠하는 것을 늘 보았다. 팔십 평생을 살아와 보니, 어릴적 마을 앞 건너편 멀리서 어슴프레 보이던 늑대의 미묘한 울음소리, 닭을 잡아가는 살쾡이 등 자연현상이 내 작업에 내재된 정신성이라는 점을 부인 할 수 없다.11)” 이 맥락에서 주역에서 출발하여 현수선, 마블링 작업에 이르는 예술지평의 확장은 궁극적로 이태현 작가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대의 층위(historical layers)에 쌓인, 기억을 다스리는 수행으로써 세계의 해석과 미학적 표출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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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현 미술가 친필 사인. 사진=권동철. © 2026. Lee Tae Hyun. All rights reserved. |
“법은 사람마다 전수받을 수 있지만 정신과 흥회(興會)는 사람마다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다. 정신이 없는 것은 서법이 아무리 볼 만하다 해도 능히 오래두고 완색하지 못하며 흥회가 없는 것은 자체(字體)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기껏해야 자장(字匠)이란 말 밖에 못 듣는다.12)”
이런 관점에서 이태현 작가에 내재된 풍토성은 이태현회화의 장(場)으로 유입되고 회화적 문제의식을 계발(啓發)시킨 자양분이 되기도 한 것이다. 바로 우주자연계와 존재론적 발자취의 65년 화업정신과 다름이 없다. 바로 이것이 이태현 추상회화의 본질인 것이다.
[참고문헌]
1)무한자와 우주와 세계·원인과 원리와 일자(De l’infinto, universo e mondi/De la causa, principio e uno),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지음, 강영계 옮김, 연암서가.
2),5),6),9),11)이태현 미술가, 나의 고향 유습(遺習)과 작업정신, 2026.
3)대논리학Ⅰ(Wissenschaft der Logik), G.W.F.헤겔 지음, 임석진 옮김, 자유아카데미.
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연경당에서, 최순우 지음, 학고재.
7)무한자와 우주와 세계·원인과 원리와 일자(De l’infinto, universo e mondi/De la causa, principio e uno),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지음, 강영계 옮김, 연암서가.
8),10)도산서원, 한형조·최진덕·정수환·정석태·이남옥·황정연·박인호 지음, 한국학중앙연구원.
12)추사 김정희, 완당전집 제8권 잡지(雜識),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譯, 1988.
[글=권동철 미술전문기자·전문위원, 6월4일 2026. 인사이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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