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철의 화가탐방]화가 조향숙①‥석도륜 선생과의 만남과 지도[서급당 조향숙,西級堂 趙香淑,논객 석도륜, 昔度輪, 조향숙 작가, Jo Hyang Sook]
1970년 불암사 불교대학생수련회 때. 앞줄 맨 왼쪽이 석도륜 선생. 두 번째 뒷줄왼쪽에서 두 번째 긴 머리 여학생이 조향숙. 사진제공=조향숙. |
석도륜 선생은 1970년 불암사 수련회 때 학생들에게 한국사찰현판과 주련, 한국전통불교미술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 당시 감명을 받았던 조향숙은 대학원논문(韓國佛畵硏究) 지도교수로 만남을 이어갔다. 조향숙은 1969년부터 사제의 인연이 되어 사물을 보는 시각, 예술가로서의 태도 등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학원 졸업 후에도 매주 화요일, 금요일 정기적인 모임으로 불경을 비롯해서 사서삼경 강의와 서예 및 불화지도를 받았다. 2011년 6월16일 석도륜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사제의 인연이 이어졌다. 이 글을 석도륜 선생님이 육필원고로 써 주셨는데 조향숙 첫 개인전 도록에 수록하게 되었다. 개인전을 위해 친히 써 주신 글이다.1)”
1986년 서급당 조향숙(西級堂 趙香淑) 제1회 개인전 동방플라자미술관 전시도록표지. 자료제공=조향숙. 촬영=권동철. 3.25. 2024. |
미술공부와 고전
[글=석도륜]
“미술(美術)에 관한 공부는 우선 고전(古典)부터 유득(俞得)해야 한다. 보고 듣고 읽고 익히고 따온다 고해도 좋다. 고전이란 말 한가운데는 일류(一流)라든가 최고(最高)라고 하는 뜻을 함축(含畜)해 있다. 그야말로 “인류발전의 원천, 인간의 가장 소중한 자원은 석유와 황금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적 능력의 무한한 가능성의 기왕의 개발인 고전”인 것인데 이러한 인간의 무한함인 고전을 탐해서 연구해 야함을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역사진행(歷史進行)을 묶고 가로막고 있어왔다.
우리 비서양(非西洋)의 선인(先人)들은 앞을 내다보면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항상 고전을 되돌아보고 되살려 왔었다. 거기에 샤타그라하(眞理把持)가 있고 아힘사(不害)의 행동원리(行動原理)가 있어서 그것을 배울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고전을 활성화(活性化)한 선지식(善智識)이면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 술집에서 웃음 나눠주는 엄숙한 부처님, 교회에서 찬송하는 경건한 부처님, 자욱한 먼지 속을 오고가는 부처님”들을 목전현존(目前現存)으로 만날 수 있다.
이른바 “잘난 사람들이 못난 사람들을 짓누르고 가진 자(者)가 갖지 못한 자를 힘으로 억압하는 투쟁의 원리 보다 높은 원리가 있음을 고전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조향숙 作=자화상, 1986. |
가령, 석가탑(釋迦塔)에서 보이듯 돌의 견고함과 중량을 살려서 고졸(古拙)스런 장미(壯美)의 태(態)를 나타내거나 다보탑(多寶塔)이 나타내듯 돌을 마치 엿가락 녹이거나 나무를 삐지듯이 정치(精緻)스럽게 우미(優美)의 태(態)를 가지고 우열(優劣)을 가릴 것이 아니라 다만 간택(揀擇)의 편에 달려 있음인데 남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간택하게 해주며 제 스스로를 간택케 되어야만 소위 자유의 바람(Winds of freedom)을 탄 부처님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부터의 내적극복(內的克服), 무지(無知)로 부터의 무한(無限)의 해방(解放) 이것은 끊임없는 오늘의 ‘샤타그라하’의 구현(具顯)과 ‘아힘사’의 실천운동 없이는 다함께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열능(劣能)하지만 나와 나의 제자(諸子)들은 나날을 두고 같은 공부를 함께 해 가고 있는 셈이다.
제1회 조향숙 개인전 출품 作. (왼쪽부터)무제(無題), 반절(半折), 장지 석채(each), 1985. 자료제공=조향숙. |
◇첫 개인전 도록수록 글을 받다
그중의 서급당조씨(西級堂趙氏,조향숙)도 시어머님, 남편 모시고 애기들 키우면서 교직(敎職)에 몸담고 화작(畵作) 활동을 쉬지 않고 하고 있다. 실로 일인오역(一人五役)을 감당하고 있는 비상천(飛翔天)이요, 맹렬녀(猛烈女)인 셈이다. 궤구(跪惧)로운 존재인 것이다. 어쩌면 공리적(公利的)인 현대인의 상황적(狀況的) 고부(辜負)가 아닐는지 모른다.
서급(西級,조향숙)은 대학. 대학원을 소위 서양화를 전공하였는데 김창락(金昌洛) 화풍(畫風)을 친자지도(親炙指導)를 입었다. 대학3학년 때 ‘국전(國展)’ 입선하여 4회 입선경력을 쌓았는데 대학원의 석사학위취득논문은 ‘한국불화연구(韓國佛畫硏究)’였었다. 학부 2학년 때 비구니(比丘尼)되기가 소원이어서 서독(西獨)에서 갓 공부하고 돌아 온 박래경(朴來卿) 교수의 소개로 나에게 와서 면담이 되면서 반연(攀緣)이뤄진 사람이다.
도록에 수록된 석도륜 글 일부. 자료제공=조향숙. 도록촬영=권동철. 3.25. 2024. |
그림 공부에 있어서는 교수작가 김창락의 영향이 막중하고 그 김창락의 날개 밑으로 인견(引見)케 해 준 고교시절의 미술교사 박인채(朴仁彩)를 비롯해 교육계에 있어서는 최태호(崔台鎬) 교장의 훈도(薫陶)와 이연의(李蓮儀) 교장의 교려추만(激勵推挽)이 서급(西級)의 오늘날의 안차(安置) 있음을 보게 된다.
거장(巨匠) 김창락과는 한 고향인 경상도 땅 가야산음(伽倻山蔭) 성주(星州)골인데 입산수도하여 비구니(比丘尼)의 길을 걷겠다는 그에게 나는 네가 찾는 것은 산(山)속에도 아란냐(阿蘭若=僧院)에도 없고 이 세속풍진(世俗風塵)속에 있다 하였던 기억이 있다. 열심히 대학생활 해보고 끝내고 나서도 비구니(比丘尼)가 되고프면 그때 다시 찾아오라고 한 바 있었다.2)”
[참고문헌]
1)대담=권동철, 조향숙 작가 작업실, 2024. 2.
2)△글=석도륜(昔度輪). 병인년(丙寅年) 4월 초팔일(初八日)일 즈음하여 서급(西汲)부처의 조상길일(造像吉日)에 써줌. △출처=조향숙 제1회 개인전, 5월15~20일 1986, 동방플라자미술관 전시도록에 수록. 자료제공=조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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