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철의 한국현대미술脈-理氣와 추사 김정희②] 판전(板殿)과 한나라 고예(古隷)[옹방강,옹수곤,금석학,진흥왕순수비,완당전집,청조문화 동전의 연구,유호 박재복]

 

봉은사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글씨 판전(板殿). 사진=권동철, 2022.


옛사람이 글씨를 쓴 것은 바로 우연히 쓰고 싶어서 쓴 것이다. 글씨 쓸 만한 때는 이를테면 왕자유(王子猷)의 산음설도(山陰雪棹)가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오는 그 기분인 것이다. 때문에 행지(行止)가 뜻에 따라 조금도 걸릴 것이 없으며 서취(書趣)도 역시 천마(天馬)가 공중에 행하는 것 같다.1)

추사 김정희는 만년에 봉은사에서 지냈다. 생전에 예서(隷書)는 바로 서법의 조가(祖家)이다.(...)한예(漢隷)의 묘는 오로지 졸한 곳에 있다.2)”라고 설파(說破)했었다. 추사가 사망3일 전에 썼다고 전하는, 마지막혼신을 쏟은 무욕경지의 걸작 판전(板殿)’ 편액왼쪽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는 자그마한 해서(楷書) 부기(附記)는 애틋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노자(老子)의 가르침 대교약졸(大巧若拙)처럼, “‘판전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방필(方筆)과 방형(方形)의 균형을 잃은 듯한 어수룩한 자형(字形)이 주는 힘과, 공교롭고자 하는 마음을 초월한 욕심 없는 마음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그 심미의 가치를 발한다고 하겠다.3)” 

그리고 또 “‘판전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땅바닥에 지팡이로 쓴 것처럼 졸한 멋이 천연스럽다.()추사는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원초의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필획엔 어쩔 수 없이 단련된 기량이 남았다.4)” 

추사는 1856(철종9) 101071세로 홀연히 영면에 들었다. “전 참판(參判) 김정희(金正喜)가 졸()하였다. 김정희는(...)총명(聰明)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서적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金石文)과 도사(圖史)에 깊이 통달하여 초서(草書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隷書)에 있어서 참다운 경지(境地)를 신기하게 깨달았었다.()세상에 쓰이고 혹은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고 또는 물러갔음을 세상에서 간혹 송()나라의 소식(蘇軾)에게 견주기도 하였다.5)”

 

서한(西漢)-제백상석(第百上石)탁본, 120×95. “‘제백상석 탁본은 구산한묘(龜山漢墓)에 진열한 특수한 석각이다. 정제되지 않은 돌에 글씨를 새겼기 때문에 자유분방하면서도 진솔하다. 예술적 감화력이 있는 서한시기 석각 문자자료로 고예(古隷)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사진·해설출처=유호(攸好) 박재복(朴載福) 개인전-진한문자전(秦漢文字展)도록,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8.6~12, 2025.>


옹수곤과 추사의 금석학(金石學)

추사 김정희(이하 완당)1809(순조9) 아버지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 이조판서 김노경(金魯敬)의 연행(燕行) 때 수행했다. 스물네 살의 청년, “조선의 기린아(麒麟兒) 완당이 연경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우뚝 솟은 성벽과 화려하고 광대한 궁전, 누각 따위가 아니라 그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석학, 홍유 들이었다. 

동쪽나라 사신들이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았던 명소 구경은 그에게는 일종의 유치한 놀음에 불과했다. 그는 제일 먼저 어느 집을 찾아가 대문을 두드릴까 생각했다.(...)완당이 연경에 체류할 때 가장 마음을 쏟아 붓고 제일 감격한 인물이 바로 옹담계와 완운대 2대 경사였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옹담계는 완당에게 각별한 환대를 베풀어주었다.6)” 

완당은 1810년 가경(嘉慶)15년 춘정월29, 당시 79세였던 청()의 석학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을 서재 석묵서루(石墨書樓)에서 만난다. “청대후기는 새로운 낭만주의시대를 맞아 청말 화단은 열심히 금석(金石)의 기()’를 사랑하였다.7)”라는 관점에서 약3,500년 중국서예를 관통해 온 정점의 자리에 옹방강과 완당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러 인사(人士)들을 만난 완당은 서()의 원류를 터득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 방향성을 정리하기에 이른다. 바로 ·(漢魏) 이하 금석(金石)의 문자가 수천 종이 되어 종·(鍾索) 이상을 소급하고자 하면 반드시 북비(北碑)를 많이 보아야만 비로소 그 조계(祖系)의 원류의 소자출(所自出)을 알 수 있다.8)”라는 고법(古法)의 탐구가 핵심이었다.

 

동한(東漢), 시설칠언마애제기(詩說七言摩崖題記)탁본, 85×44. “‘공현시설칠언한마애제기(鞏縣詩說七言漢摩崖題記)’라고도 하며, 공의석굴(鞏義石窟)안에 있는 한나라 때의 제기(題記)이다.”<사진·해설출처=유호(攸好) 박재복(朴載福) 개인전-진한문자전(秦漢文字展)도록,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8.6~12, 2025.>


이 지점에서 완당에게 금석에 대해 본격적으로 눈뜨게 한 사람을 살펴보자. 그는 옹방강의 여섯 째 아들 옹수곤(翁樹崐,1786~1815)으로 자는 성원(星原)이다. 이 둘은 병오년(丙午年) 동갑내기이기도하다. 

수곤은 석묵서루에 소장된 금석자료를 탐독하고 특히 완당을 맞이해 해동의 금석에 대해 논하면서 손뼉을 치며 뛸 듯이 기뻐했고 저절로 곧 의기투합했다.(...)그는 추사에게 조선의 금석에 관한 옛 탁본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보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 추사를 통해 알게 된 조선의 여러 명사들에게도 부디 힘써 탁본을 많이 수집해달라고 청했다.9)” 

이렇게 하여 완당은 귀국 후에도 교류하였는데 뜻밖에도 1815년 젊은 나이로 수곤이 사망하게 된다. 소식을 김정희에게 알리던 옹방강은 옹수곤이 금석학에 상당한 성과를 거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울러 옹수곤의 비목쇄기(碑目瑣記)도 조선으로 전해졌다.10)” 

이후 완당은 금석(金石)에 더욱 매진하였고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1816(순조16) 해독해 낸다. 이것은 조선의 금석학 개척자로서 추사 김정희를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하는 초석이 된다. 


[참고문헌]

1),8)완당전집 제8권 잡지(雜識),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 1988.

2)완당전집 제7권 잡저(雜著) 우아에게 써서 보이다(書示佑兒),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1988.

3)추사의 서화-마음으로 쓰고 그리다, 이필숙 지음, 다운샘.

4)추사 김정희-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창비.

5)전 참판 김정희의 졸기, 철종실록8, 철종71010일 갑오3/3기사, 1856년 청 함풍(咸豊)6. 출처=조선왕조실록(https://sillok.history.go.kr/).

6),9)秋史 金正喜 硏究(추사 김정희 연구)-淸朝文化 東傳硏究(청조문화 동전의 연구),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지음,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엮음, 윤철규·이충구·김규선 옮김, 과 천문화원 2009.

7)동양미술사, 마츠바라 사브로(松原三郞), 최성은 외 , 예경.

10)추사 김정희의 금석학 연구:역사고증적 측면을 중심으로, 박철상 계명대학교대학원, 2011.

 

[=권동철 미술전문기자·전문위원/172026. 인사이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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