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철의 한국현대미술脈-理氣와 추사 김정희①]한(漢)나라 비각(碑刻)과 추사 김정희[예서,팔분체,옹방강,완원,비학(碑學),후지 츠카 치카시(藤塚鄰),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마츠바라 사브로(松原三郞),낭야군계역각석(琅琊郡界域刻石),금석학자·서예가 유호 박재복,삼로기일비(三老忌日碑),한인명(韓仁銘),박재복 경동대학교 교수,화암사,Park Jae Bok

 

() 12년 낭야군계역각석(琅琊郡界域刻石)탁본. 240×115. “서한과 동한시대 중간인 왕망(王莽)의 신()나라 때 각석탁본이다. ‘東海郡朐與琅琊郡櫃爲界, 因諸山以南屬朐, 水以北屬櫃, 西直況其, 口與櫃分高口爲界, 東各承無極. 始建國四年二月朔乙卯, 以使者徐州牧治所書造.’와 같이 60여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사진제공·해설출처=유호(攸好) 박재복(朴載福) 개인전-진한문자전(秦漢文字展)도록,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8.6~12, 2025.>


서와 화()는 도가 한 가지이다.1)”


중국서한과 동한시대 중간인 신()낭야군계역각석을 추사가 보았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추사생존 때는 발굴되지 않았던, 삐뚤삐뚤하지만 억겁풍상을 이겨낸 우주질서의 숨결을 품은 탁본은 추사가 만년에 남긴 무기교의 순수유희 판전(板殿)’서체와 묘하게 오버랩 되었다.

 

(왼쪽)동한(東漢) 52년 삼로기일비(三老忌日碑) 탁본. 45×91. “삼로비(三老碑)는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이 과도기적인 서체로, 동한 건무(建武) 28(52)에 건립했다.” (오른쪽)동한(東漢) 175년 한인명(韓仁銘) 탁본, 97×185. “한인명(韓仁銘)은 동한(東漢) 희평(熹平) 4(175) 1122일에 예서(隸書)로 새긴 비문으로 전체의 명칭은 한순리고문희장한인명(漢循吏古聞憙長韓仁銘)’이라고 한다.” <사진제공·해설출처=유호(攸好) 박재복(朴載福) 개인전-진한문자전(秦漢文字展)도록,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8.6~12, 2025.>

 

중국문자는 상() 갑골문, 주대(周代)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 춘추전국을 지나 진()이 통일을 이룬 시기 직선적이며 장식성이 적은 간편한 서체, 즉 예서(隷書)가 싹트고 있었다. 진과 전한시대에 걸쳐서 발생되었던 이 간략체를 일반적으로는 고예(古隷)라고 부른다. 후한 후기에 들어 가장 많이 건립되었다고 하는 한비(漢碑)에는 단전한 팔분체(八分體,예서)가 그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다.2)” 

추사 역시 ()의 글자가 변하여 정서(正書)가 되고 행초(行草)가 되었는데 그 전이(轉移)는 한말(漢末) ·(魏晉)의 사이에 있었다. 이를테면 서경(西京)의 고예(古隷)가 못()을 베고 철()을 자른 것 같으며 흉하고 험하여 두렵게 뵈는 것은 곧 건()을 쌓아 웅()이 되는 의()이며, 청춘의 앵무(鸚鵡)는 꽃을 꽂은 무녀(舞女)가 거울을 당겨 봄에 웃는 의이며, 능히 이십사품(二十四品)의 묘오(妙悟)가 있다면 서경(書境)이 곧 시경(詩境)인 것이다.3)”라고 설파했다. 

부연하면 (추사)의 서예는 한··육조(漢魏六朝)의 체()를 규범으로 삼아 거기에 가지가 뻗어나서 더욱 무성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를 예스럽게 여기면서도 공이 멀리 고인의 법을 터득하여 스스로 그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을 알지 못한다.4)”

 

충남예산군 화암사(華巖寺)가 있는 오석산(烏石山) 병풍바위에 새겨놓은 추사의 필적 암각문 시경(詩境). “이는 추사 김정희선생이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받은 탁본글씨를 새겨놓은 것이다. 예서(隸書)로 쓴 이 글씨는 송나라 시인으로 많은 사람들로 부터 추앙을 받던 인물인 방옹 육유(放翁 陸游)의 글씨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이 좋은 글씨를 후대에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이곳 병풍바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김정희 선생 필적 암각문(筆跡 岩刻文) 해설 .” <사진=권동철.>


추사의 비학(碑學)과 실사구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경주김씨(慶州金氏)24세 때 부친 김노경(金魯敬)이 연행(燕行)할 때 함께 들어갔다. 조선순조91809년 때이다. 추사는 그곳에서 청() 최고유학자였던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1732~1818)과 제자인 운대(芸臺) 완원(阮元,1764~1849)을 만나 교유하는 천운의 기회를 맞는다. 

당시 청나라는 첩학(帖學)과 비학(碑學)이라고 하는 두 개의 길은 있지만 이 시기의 고전주의의 특색은 하나같이 고법(古法)의 탐구와 새로운 전형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것에 있었다.5)” 옹방강은 추사에게 금석학, 서첩학, 연경(硏經)방법론을6)”지도해 주었고 당시 47세였던 완원은 첫눈에 완당이 비범한 영재임을 알아보고 나막신을 거꾸로 신을 만큼 황급히 그를7)”맞이했다. 이어 완원이 지은 연경실문집(揅經室文集)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기증8)”받은 김정희는 경의한묵(經義翰墨)의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귀국, 후에 더욱 학문에 맹진하여 한반도의 새로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선포하였다.9)” 

한편 명호(名號) 추사(秋史)는 중국연경에 가기 바로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해서 중국체류 동안 추사로 행세했다. 귀국 후 중국에서 만난 옹방강과 완원, 두 스승을 흠모하며 섬기기 위해 많은 명호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명호 완당(阮堂)인데 완원을 존경하고 기리기 위해 썼다. 중국 설문해자(說文解字) 내용으로 보면 추사가 쓴 완당의 당()은 당()의 옛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추사가 철저하게 금석학(金石學)에 근거하여 썼음을 방증한다.10)”

 

[참고문헌]

1),3)완당전집 제8권 잡지(雜識),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 1988.

2),5)동양미술사, 마츠바라 사브로(松原三郞), 최성은 외 , 예경.

4)완당선생전집서(阮堂先生全集序), 계유년 끝 겨울에 정인보(鄭寅普)는 서하노라.

6)~9)秋史 金正喜 硏究(추사 김정희 연구)-淸朝文化 東傳硏究(청조문화 동전의 연구), 후지 츠카 치카시(藤塚鄰)지음,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엮음, 윤철규·이충구·김규선 옮김, 과천문화원 2009.

10)추사-명호처럼 살다, 최준호 지음, 아미재.

 

[=권동철 미술전문기자·전문위원, 1012025. 인사이트코리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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