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철의 화가탐방]화가 조향숙⑤‥출세간(出世間)의 열반경지[뢰차 정신,RoeCha,불교미술,석도륜,조향숙,조향숙작가,JoHyangSook]

 

서울정릉 산장빌라의 석도륜 선생 작업실. 조향숙의 작품 심우도(尋牛圖)’의 발문(跋文)을 쓰고 있다. 사진제공=조향숙. 2003. 


“2000년대 즈음, 석도륜 선생님 작업실은 서울돈암동사거리에 있었던 토마스병원 자리였다. 나와 뢰차(RoeCha)동인 그리고 선생님께 강의를 듣고 싶어 하던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매주 화요일에 모여 사서오경을 강의 들었다.1) 

본시 불교의 외호가(外護家)아쇼카(쿠씨아나왕조)’의 세력권이던 중-남부 인도의 불교미술은 뒤이어 굽타 왕조(AD 4C~7C)’에 이르러 드디어 불교미술의 정점을 이루게 된다. 이 굽타 왕조의 그리스-간다라풍의 전형미(典型美)에다 인더스풍의 우미(優美)를 가중시킨 그 대표적 작례인 아잔타석굴벽화가 제6세기에 우덴(于閴)-로란(樓蘭)-서하(西夏)-돈황(敦煌) 등 서역을 거쳐 중국()에 이르렀다가 우리의 고구려-백제-옛 신라-통일 신라를 자극하고 휩쓸은 나머지 그 넘쳐흐르는 잉여문화를 우리 스스로 일본 땅에까지 전파시켜 주었던 것이다. 

굽타왕조의 말류(末流)는 제8세기에서 12세기까지에 이르면서 많은 석조(石造) 고층건물들을 축성해냈지만, 13세기 이슬람의 침입자인 파쿠티알 키리지에 의하여 인도의 불교 미술들은 철저히 파괴당하여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만다. 불교조상의 본래적 주제는 어디까지나 불타 삭가의 쟈타카(本生譚)’ , 그의 일대기를 기록적으로 조상한 데서부터 시발한다. 

흔히 우리의 항간에 팔상록(八相錄)팔상전(八相殿), 영산전(靈山殿)=羅漢殿(나한전)에다 석가삼존을 곁들인 것 등은 모두가 이 쟈타카의 변상(變相)들이다. 변상이란 변문(變文)과 함께 참으로 불가사의한 불타의 도리(道里)를 알기 쉽게 경전(經典)으로서, 글 그림으로 옮겨놓았음을 뜻한다.(정진탁(鄭振鐸) ‘中國俗文學史). 

벌써 불타 조상의 출현 이전에 석가생애의 사적지(事蹟地)를 신성시 하게 되어 생탄(生誕)-성도(成道)-초전법륜(初轉法輪)-반열반(般涅槃)4대성지 등의 장식 및 승가(僧伽)의 거쳐(居處=阿蘭若) 마저 장엄화 되어지는 쪽으로 치닫게 되어 갔었다. 불교 미술의 본질은 끝내 신격화해서는 안 된다는 불타의 본지를 그르친 중생들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다.

 

석도륜 =(왼쪽)십대제자-나한도, 62×136, 목판화 (오른쪽)십대제자-나한도, 62×136, 목판화. 사진제공=조향숙.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석가본존의 입술에 붉은 주사(硃砂) 빛깔이 보이는 것은 현존인도의 온갖 유구유품 가운데 붕괴되다 못한 흔적 한쪽에서도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채색, 장엄(莊嚴)이 완연하고, 퇴락된 나머지의 석상(石像), 소상(塑像) 조각위에도 도금(鍍金)의 빛이 분명함에 비추어, 불타의 근본 교리와 불교미술사이의 괴리(乖離)를 생각할 때 미()의 가치는 단순히 참()의 가치에 육박하기 어려움을 새삼 깨닫게 된다. 

원래의 불타의 교설(敎說), 석가자신이 증오(證悟)한 바 불교의 본뜻은 인간이 모든 집착 번뇌를 멀리하고 일체의 사고팔고(四苦八苦)’로 얽혀진 속세를 이탈하여 소위 출세간(出世間)의 열반경지에 이르기 위한 노력 이외의 일에 관심을 쏟지 못하게 차단하려 했던 것이다. 이른바 불교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조상, 조탑(造塔), 조축(造築) 따위를 이룩하려면 절로 재가(在家) 신자의 재시(-布施)를 얻어야 하며 재시를 하는 자는 반드시 시속말로 수혜자 부담이거나 반대급부를 마음속으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저 보리달마대사(菩提達磨大師)가 양()나라 무제(武帝)와의 문답에서 호무공덕(毫無功德)’이라 한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이다.

 

1994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서울주제 서예 큰 잔치전 포스터. 석도륜 선생의 붉은 바탕의 글씨가 포스터 메인으로 수록 되었다. 자료제공=조향숙


불타는 구도자들에게 너희들, 여래의 사리공양(舍利供養)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너희들은 진의(眞義)를 향하여 매진하라. 오로지 진의만을 전수(專修)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출가자는 미()와 애()를 찬미-찬탄해 볼 겨를을 가지면 못 쓰는 것이다. 불타의 본 뜻대로 한다면 착잡한 모양()과 색()이 요란 풍부한 미술을 즐길 수 있는 토양은 세속 말고 승가람, 거기에는 없어야 한다. 

하물며 우아하고 화려한 여성은 오히려 아름답기 때문에 원시불교에 있어서 부정관(不定觀)의 대상이 되어 질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금 앞에서 든 바와 같이 불타 스스로의 말씀대로라면 인간 본유의 장엄(莊嚴)에의 거센 충동과 재가(在家) 불교도의 신앙숭배의 열정으로 인하여 이른바 불교미술은 불가불 움트고 싹터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1)대담=권동철, 조향숙 작가 작업실, 2024. 5.

2)=석도륜(昔度輪). 병인년(丙寅年) 4월 초팔일(初八日)일 즈음하여 서급(西汲)부처의 조상길일(造像吉日)에 써줌. 출처=조향숙 제1회 개인전, 515~201986, 동방플라자미술관 전시도록에 수록. 자료제공=조향숙.

 

1979년 뢰차 창립전부터 이 글은 계속 뢰차 전시도록에 수록되었다. 바로 뢰차의 정신이다. ‘이 글은 석도륜 선생이 직접 썼다라고 조향숙 작가는 말했다. 2024.6.10. 조향숙 작가 작업실에서. 대담=권동철.

 


뢰차
生涯寄醉吟 劣能學得古般音 到頭祗笑吾癡着 無一詩中不說琴

 

우리들은 劣能 뢰차 모임이다. 栴檀不成林이라. 본디 향나무와 같은 名木은 숲을 이루어 자라는 법이 없다지만 뢰차는 하찮은 풀 섶 조약돌 푸석인 것이다. 문자 그대로 草介같은 것이다. 

靈山喬獄叢林을 이루었던 숲이 반드시 名木巨樹만으로 茂盛하였던 것은 아니었으며 千里洛東江水澗澗細流의 모임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도 山林을 풍성케 하는 풀섶이요 흐름의 江心은 아니어도 泥澤인 것이다. 죽어져 그냥 空木에만 의지하는 亡靈 되기에 앞서 劣能이나마 造形的性情을 기리는 축이 되고져 하는 것이다.

 

己未年秋將冬之間

藝集 뢰차동인, 197912월 뢰차 창립전 때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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